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도 제국 (문단 편집) == 그 외 == 섬나라 영국은 인도 제국을 통하여 '''[[영국/역사|영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국]] 타이틀을 획득해 [[황제]]를 칭할 수 있었다.''' 영국은 관용상 '대영제국'으로 부르는 것과는 달리 영국 본토를 기준으로 제국을 칭한 바가 없었고 '''[[동군연합|영국의 왕인 동시에 인도 제국의 황제]]'''로서 인도에서 황제에 오른 것이다. 영국이 자국 왕을 황제로 올리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로마 제국]]의 정통성과 무관했기 때문이다.[* 사실 [[로마 제국]] 계승성을 주장하는 것은 그냥 적당히 갖다 붙이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황제를 자칭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는 있었고 실제로도 이전에 [[영국]]이 자체적으로 국왕에게 황제 칭호를 부여하고 했던 시도가 있었다. [[조지 3세]] 시절 [[아미앵 조약]]으로 [[프랑스 제1공화국]]을 승인하면서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거긴 하지만) 프랑스 왕위 타이틀을 포기해야 했고 [[미국 독립 전쟁]]과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은 [[아일랜드인]]들이 프랑스의 지원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고 아일랜드인들의 효과적인 통제을 위해 영국의 속령이긴 했으나 아직까지는 명목상으로는 영국과는 별개의 국가였던 [[아일랜드 왕국]]을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정식으로 영국 본토의 일부로 편입시켰다.]] 이렇게 왕위 2개를 잃어버린 왕을 위로하고자 영국 의회에서 자국 군주에게 황제 칭호를 부여하고자 했으나, 영국 왕이 [[동군연합]]으로서 겸하고 있던 [[하노버 왕국]] [[선제후]]([[신성로마제국]] 산하의 [[번국|봉신국]])라는 이중 직위로 인한 외교 마찰을 우려한 조지 3세에 의해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하지만 조지 3세가 황제 칭호를 사용하자는 제안을 기각한 지 불과 몇 년 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황제를 자칭하면서 유럽 군주들의 칭호 인플레가 시작되었다. 더군다나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고 얼마 안 있어 신성로마제국은 해체되었던 점도 있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황제를 자처한 제국 - [[카롤루스 대제]]의 [[프랑크 왕국]]과 뒤이은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이나 심지어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까지도 - 은 반드시 로마 제국의 정통 후계임을 자처했다.[* 자세한 것은 [[제3의 로마]] 항목을 참조.] 잉글랜드 왕과 프랑스 왕이 신성 로마 황제 선거에 도전할지언정 자국의 황제를 자처하지 않았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로, 이런 전통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이르러서 깨진다. 나폴레옹은 중세적인 봉건 혈통에 의해서가 아닌, 국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공화정 위에서 집권했다. 그는 의회를 통해 국민이 황제로 임명해주는 형식으로 제위에 올랐으나, 그나마도 [[샤를마뉴]] - 로마의 후계를 자처하는 신성로마제국의 건국황제 - 의 후계자임을 자처해 간접적으로라도 로마와 연줄이 닿아 있다. 유럽 내 국가들이 제국을 칭하기 위해선 상술했듯이 [[로마 제국]]과의 연줄이 있어야 했지만, 로마와의 연줄 없이도 황제를 칭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타 문화권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중동]]이나 인도, 중국 등 유럽 바깥의 타 문화권에서 황제를 칭할 경우 이 제국들은 로마와의 연줄이 없음에도 유럽 국가들은 이들을 제국으로 인정해 주었다.[* 무굴 제국의 미르자, 페르시아의 [[왕중왕]], [[명나라|명]]과 [[청나라|청]]의 [[천자]], 일본의 [[천황|덴노]], [[에티오피아]]의 [[느구서 너거스트]], [[몽골]]-[[투르크]]의 [[대칸]] 등 유럽 바깥의 황제급의 칭호를 유럽의 황제와 똑같이 취급한 것도 바로 이 이유에서였다. 약소국이여도 제국이면 그냥 황제로 인정하는 듯 하다.] 즉, 유럽 바깥의 타문화권인 인도를 제국으로 만들어 영국 국왕이 인도 황제를 겸해도 유럽 국가들은 이에 태클을 걸지 못했다. '인도 황제'라는 자리는 아예 타 문화권의 황제였기 때문이다. [[식민지]]에 제국 타이틀을 달아준 것은 이런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영국은 인도 각지의 제후들의 자치를 계속 인정했으니 영국 국왕이 그들 위에 군림한다는 모양새를 갖출 필요도 있어서 인도 황제 칭호를 덧붙인 것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당시 [[빅토리아 여왕]](Queen)의 장녀인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자]] 공주(동명이인)가 [[프로이센 왕국]]의 왕세자 [[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프리드리히]]에게 시집갔는데, 프로이센이 [[독일 제국]]을 만들게 되자 빅토리아 공주가 향후 [[황후]](Empress)가 될 상황이었다. 그래서 빅토리아 공주가 독일 황후(Empress)가 되면 모친인 빅토리아 영국 [[여왕]](Queen)의 칭호를 역전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므로 자존심 상해 하던 [[영국인]]들이 일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벤저민 디즈레일리]] 당시 [[영국 총리]]가 인도 황제/여제라는 칭호를 쓰는 게 인도 통치에도 유리하고 영국 국민의 자존심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 여제 칭호를 바치게 되었다.[* 이 조치가 취해지자, 영국 국내에서는 [[독일 제국]]에 자존심 상해 하던 일각의 반응과 정반대로 "이게 뭐하는 뻘짓이냐"고 빈정거리는 반응도 나왔다. [[빅토리아 여왕]] 문서를 보면, 인도 여제 칭호를 바칠 당시 이것을 비꼬던 풍자화를 볼 수 있다. 해당 문서 참고.] 물론 인도 황제라는 칭호는 영국 국왕이라는 칭호와 마찬가지로 형식적이었고 실제 지배는 영국에서 파견한 [[총독]]이 했다. ~~[[입헌군주제]]~~ 인도 제국 성립 후에 파견된 인도 총독들은 인도 [[부왕]](Viceroy of India)을 겸임했는데, 이런 영예로운 칭호가 붙는 탓에 이전의 인도 총독들과는 달리, 오로지 [[남작]][* 영국에서는 [[준남작]] 이하 귀족의 경칭으로 Sir/Dame이 붙는데 반해 남작 이상의 귀족에게는 더 높은 [[로드|Lord]]/[[레이디|Lady]]가 붙는다. 그리고 지금은 제도가 바뀌었지만 과거 영국은 1990년대 말 [[토니 블레어]] 정권 초기까지 왕족을 제외한 남작 이상의 귀족들은 무조건 자동으로 종신직 [[영국 귀족원|귀족원]]([[상원]]) 의원이 되었다. 애초에 영국 귀족원의 영어 표기가 House of Lords이다.] 이상의 고위 [[귀족]]들만이 취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대 부왕 목록에서 귀족들의 작위의 상당수가 1대라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부왕 내정자가 평민이거나 준남작 이하의 귀족일 경우 남작 이상의 귀족의 작위를 수여한 뒤 정식으로 부왕 임명장을 내리는 식으로 운용했다. 따라서 인도 부왕 겸 총독직은 평민들에게도 어느 정도 개방된 직위였다. 실제로 평민 출신인 웨이벌 원수도 인도 부왕직에 오르기 위해서 [[자작(작위)|자작]]위를 받았다.[* 사실 영국은 과거의 인도 부왕직 뿐만 아니라, 지금도 몇몇 고위직에 대해 이런 식으로 평민에게 작위를 주고 임명하는 식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 귀족원(상원) 의원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또는 [[대법관]]으로 임명하~~거나 정적을 엿먹이~~기 위해 남작 이상의 작위를 내리는 식이다.] 식민지에 제국 타이틀을 달아준 건 [[포르투갈]]이 만든 [[브라질 제국]]이 원조다. 다만 이건 자국용이고 인정을 못 받았다. 다만 이쪽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반도 전쟁|본토는 탈탈 털리고]] [[라틴아메리카/독립|브라질이 독립을 해서]](…) 사실 브라질 왕국으로 할 수도 있었는데 굳이 제국을 자칭한 걸 보면 황제 호칭을 바라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인도 반도]]는 [[식민지]] 시기에 처음 통일되었다.[* 포르투갈([[고아]], [[다만]], [[디우]], [[다드라나가르하벨리]])이나 프랑스가 지배한 곳([[퐁디셰리]], [[야나옹]], [[마에]], [[카라칼]], [[찬데르나고르]])도 있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 통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포르투갈과 프랑스가 점유한 지역은 영국이 점유한 지역에 비하면 그야말로 엄청 작았던지라.][* 이 점은 [[아일랜드]]도 비슷하다. [[잉글랜드 왕국]]의 [[헨리 8세]]가 [[아일랜드 섬]]을 모두 정복하고 [[아일랜드 왕국]]을 선포하면서 아일랜드 통일이 이뤄진다.] 그렇기에 인도반도 전역이 통일된 것은 인도 제국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전 인도를 지배한 왕조가 없었다. 다만 [[마우리아 왕조]]와 [[무굴 제국]]이 최남단 일대를 제외한 인도반도 대부분을 영향력 아래에 두어 거의 통일 직전까지 간 적은 있었다. 사실 북부의 아리안계와 남부의 드라비다계는 종교를 제외하면 언어도 문화도 역사도 전혀 다르다. [[식민지]] 시기의 부정적인 측면이 존재하는데, 1757년부터 1947년 사이의 인도의 1인당 소득은 전혀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다만 제 1, 2차 세계대전과 벵골 대기근 등 부정적인 영향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실제로는 19세기 후반기 동안 기근이 겹치고 상당수 농민들이 재산을 처분하고 임노동자로 전락하면서 소득이 절반 이하로 감소했을 거라는 추측이 우세하다.[*출처: Late Victorian Holocausts / 마이크 데이비스 저] 1872년부터 1921년 인도 서민의 평균 수명은 놀랍게도 20% 정도 하락했다. 인도가 위생적으로 불량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영국의 위생상태가 획기적으로 나아져서 평균수명이 크게 늘어난 것을 감안하면 인프라 시설에 돈을 생각보다 많이 들이지 않았다는 소리이다. 또한 인도에 근대식 교육을 도입했다고는 하지만, 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계층은 어디까지나 소수에 불과했고, 인도의 [[문맹률]]은 독립당시에 80%를 넘는 수준이었다. 즉, 인도지배의 좋은 측면들은 거의 상류층에 국한되었으며 하류층들은 별 혜택을 못 봤다는 얘기이다. 그 영국조차도 '''[[선교]]계 최강의 [[몹]]'''인 '''[[힌두교]]'''만큼은 어찌할 수 없었다. 적어도 인도 본토에서는 말이다. 더구나 과거에도 [[불교]]와 [[이슬람교]]의 도전을 모두 나가떨어지게 만들었다. 이슬람의 입장에서도 인도는 최종 [[던전]]이다. 인도 제국이 세계사적으로 끼친 가장 유명하면서도 악명 높은 업적(?)은 [[아편]]이다. 당시 인도는 아편의 주산지였는데, 영국이 [[중국]]의 [[차]]에 대한 거래 대금으로 이걸 뿌리는 바람에 [[아편전쟁]]이 터졌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8ZbcNF67Dp4)]}}} || || '''{{{#fff 1941년 인도 제국군의 훈련 모습}}}''' || 그래도 잘 살펴보면 인도인들이 [[영국군]]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 편이다. 식민지에서 '영국군'으로 싸운 군인들 중 [[인도인]]들이 은근히 많다. 인도 군인들은 [[청나라]]를 공격하는데 동원되기도 했으며 이는 [[중인관계]]가 틀어지는 사실상의 시발점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시는 영국령 인도군(British Indian Army)이라는 이름으로 [[서부전선]], [[갈리폴리]] 등에 투입. 특히 망해가는 [[오스만 제국]]과 치열하게 치고박고 싸우고 했던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타인]] 전선은 대부분의 장병들이 영국령 인도군 소속이었기 때문에 이를 두고 '''[[튀르크]]와 [[힌두교|힌두스]]의 싸움'''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인도 제국은 알게 모르게 [[한국사]]에도 간접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바로 [[1905년]] 2차 [[영일동맹]] 당시 영국이 인도 제국의 지배를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의 보호국화를 인정한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미 반석에 오른 인도의 통치보다는 '인도의 국경선을 보장', 즉 영국이 병합한 지 얼마 안 된 [[미얀마]]의 병합을 승인하는 목적이 강했다.]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는 비백인 피식민지인들을 격동시켰는데, 안그래도 쥐어짜이며 부글거리는 2억 인도인들을 상대로 일본이 아시아주의 홍보만 때려도 식민지 치안소요가 급증할 우려도 컸다. 실제로 2차대전기에 많은 아시아인들이 대동아공영권을 환영했다… 일본군하고 직접 만나보기 전까지는. 흔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인도까지 [[정복]]'''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알렉산더 대왕은 우리가 흔히 인도라고 부르는 곳의 본토에 침입하기는커녕 지금의 [[파키스탄]] 언저리만 살짝 찔러보고 회군했다.[* 포루스 왕이 이끄는 [[코끼리]] 군단에 의외의 고전을 한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놈은 사천왕 최약체지|"사실 포루스 왕은 인도의 군벌 중 가장 약한 녀석이었지!"]]'''라는 소문에 경악해 겁에 질려버렸고(사실 이건 전투에서 진 포루스 왕의 병사들이 뻥을 친 것이다. 포루스 왕의 펀자브 왕국은 당시 인도 내의 수많은 국가들 중 강하기로는 한 손가락 안에 꼽히는 나라였다.), 천하의 알렉산드로스도 끝내 부하들의 사기를 되돌리지 못하고 [[바빌론]]으로 회군한 후 병사한다. 물론 마케도니아 병사들이 펀자브 왕국의 병사들의 거짓말을 들었다고 사기가 바닥을 칠 정도로 바보도 아니었고 이들에게 심각하게 당한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북서부 지역을 공략하고 이 거짓말을 들은 뒤 만난 다음 상대가 그 펀자브 왕국을 털어먹던 '''당시 인도 북부의 끝판왕 [[난다 왕조|난다 왕국]]이었던 게 문제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난다 왕국의 군세 앞에서는 여태까지의 기세가 꺾이고 말았고, 난다 왕국의 강력한 군사력에 발이 멈춘 마케도니아 병사들의 사기도 뚝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병사한 후에 [[마케도니아 제국]]의 후계국 중 하나인 [[그레코-박트리아 왕국]] 시절에 [[그리스인]]들이 재차 침략해와서는, 알렉산드로스 때와는 달리 정말로 [[인도]]의 여러 나라들을 개발살내고 [[인도-그리스 왕국|떡하니 나라까지 세워서]], 서기 9세기 경까지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다만 당시에는 [[이란]] 동쪽에서 [[인더스강]]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 인도였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인도를 정복한 게 맞기는 하다. 그 유명한 [[간다라]] 미술도 본국인 인도 입장에서는 파키스탄 일부 지방의 변방 민속 예술 수준에 불과하다. [[엘리자베스 1세]]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애초에 그 시절 인도는 영국 식민지도 아니었다~~ 이는 [[토마스 칼라일]]의 말이 와전된 것이다. 지배국인 영국이 그래도 비교적 평화롭게 독립을 허용해 줘서인지 인도 제국에서 갈라진 네 나라 모두 [[영연방]]에 가입해 있는 상태이다. 파키스탄은 인도와의 불화 문제로 1972년 연방을 탈퇴했으나 2004년에 복귀했다. 제국이라는 타이틀 탓인지 [[무굴 제국]]과 혼동되는 경우가 많은데, 무굴 제국은 인도 제국이 성립하기 바로 전에 인도 반도에 존재했던 [[몽골 제국]]과 [[티무르 제국]]의 후신[* 무굴 제국의 초대 황제 [[바부르]]가 부계는 [[티무르]]의 후손, 모계는 [[칭기즈 칸]]의 후손이며 티무르도 생전 몽골 제국의 후예를 자처했다.]을 자처한 [[이슬람]] 왕조이다. 인도 제국에서 갈라진 4개국은 하나같이 인구가 어마어마하다. 네 나라 중 가장 인구가 적은 [[미얀마]]도 5,500만 명으로 [[대한민국]]보다도 많고, 인도 동쪽에 조그맣게 끼어있는 [[방글라데시]] 인구가 '''1억 6천만 명'''이다.(세계 7~8위)[* [[방글라데시]] 인구가 '''[[러시아]]'''를 능가한다. 러시아 지도와 방글라데시 지도를 번갈아 비교해보면서 놀라주자. ~~세계지도로 비교시 러시아가 훨씬 북쪽이라 엄청 차이 나 보인다~~ 일부 출처에서는 1억 6,500만 명까지도 올라간다. 더군다나 여기는 더 놀랄 일이 따로 있다. [[바티칸]] 같은 [[도시국가]]를 제외하면 이 국가가 '''세계 인구밀도 1위'''이다. km²당 인구가 1,100명에 달한다. 참고로 2위는 [[대한민국]]이다.] [[파키스탄]]의 인구가 '''2억'''이다. 인도는 최근에 '''14억''' 명을 넘기었다. 이 인구를 다 합치면 '''18억'''에 육박하며 중국 인구를 압도하는 '''세계 1위'''이다. 더구나 산아제한정책으로 출산율이 세대교체율을 밑도는 중국과는 달리, 이들 인도계 국가는 하루가 다르게 인구 폭증, 해마다 수천만 단위로 인구가 늘어난다. 인도 한 개의 국가의 인구만으로도 2020년 이후에는 중국을 앞지르게 될 것이라고 한다. 만약 인도 제국이 간디의 소망대로 분열 없이 쭉 이어졌다면 중국은 인구에서 2위가 되었을 것이라는 얘기가 있는데 이미 중국은 서서히 2등 라인이 되어가는 중이다. [[일본]]에서 나온 세계의 역사류 학습만화 전집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파트이다. 인도 제국 시기 [[마하트마 간디]]를 비롯한 인도인들의 대영 항쟁 [[내로남불|부분에서다.]] 일례로 [[슈에이샤]]에서 편찬한 [[https://jp.mercari.com/item/m90387048810|세계의 역사]](총 16권) 시리즈를 보면 2권에 걸쳐 세포이 항쟁,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 그리고 [[영국]] [[제국주의]]의 [[식민지]] 침탈을 매우 비중있게 그린다. 심지어 대놓고 이런 부분도 등장한다.[* 위 시리즈를 한국에서 '''[[해적판|무단으로 번역 출판한]]''' 중앙문화사 판본의 번역임.] > (영국인 현장감독) "이 녀석! 게으름 피우지 말어! 영국은 인도를 위해 [[철도]]를 건설하는 거야!" > (인도인 노동자들) '(속으로)흥! 거짓말! 면화와 차를 운반하기 위해 철도를 놓는 거면서…' 이는 일본의 소위 [[대동아 공영권]] 역사관이 어느 정도 반영된 서술이다. 일본이 [[대한제국]] 및 [[만주]] 등 [[태평양 전쟁|아시아-태평양 제국주의적 침공]]을 정당화한 논리가 "서양 [[귀축영미]]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일본을 중심으로 대동아 공영권을 형성하여 뭉쳐야 한다"는 것인데, 이를 뒷받침하는 논거로 서양 세력인 영국이 아시아인 인도를 침탈한 것에 대해 적나라하게 서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피지배 인도인에 대한 우호적인 시선은 [[찬드라 보스]]와 같이 친일적 인도 독립운동가가 있는 사실도 이와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으로 그놈이 그놈인 제국주의를 다른 제국주의와 비교하며 포장하는 것이기에 본인들이 '서구로부터 보호/해방'시켰다고 주장하는 국가에서 비슷한 짓거리를 한 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